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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나주정씨 내력(지은이 정범진 전 성균관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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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주정씨(羅州丁氏)의 내력
 
 
1. 본관(本貫)
 
나주정씨의 본관은 원래 압해(押海)였다. 압해는 전라남도 무안군에 속해 있는 면 단위의 도서(島嶼)이다. 백제 때에는 아차산(阿次山) 군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산세가 바다를 압도한다는 뜻으로 압해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로 들어와서는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한 때 영광군(靈光郡)에 예속되었고, 얼마 후에 다시 나주로 귀속되었다.
그 후 고려 말엽 이래로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1409년 즉 조선 태종(太宗) 9년에 감사 윤향(尹向)이 도내 주읍(主邑)에 소속되어 있던 속현(屬縣) () () 부곡(部曲)을 모두 폐지하여 소속 주읍으로 통폐합시켰다. 이 때 나주목 관내의 토착성씨들은 종전의 소지역적인 본관에서 나주라는 대 본관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압해정씨도 압해현이 나주로 폐합되면서부터 본관을 나주 또는 압해로 양용해 오다가, 영조(英祖) 시대에 와서는 압해가 폐읍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던지 압해를 버리고 도리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서 근자에까지 약 200여 년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압해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어 더러는 압해정씨 또는 나주압해정씨 등으로 혼용하고 있다. 구체적인 원적지를 따지자면 이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지금에 와서 나주를 버리고 압해로 복귀한다는 것은 기실 행정절차나 그동안 지켜온 인습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쉽게 고쳐질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종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본관을 나주정씨로 쓰고 있다.
 
 
2. 시조(始祖)
 
나주정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의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이다. 우리나라의 다른 성씨도 마찬가지지만 시조라고 해서 그 이전에 조상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후세 자손들이 그 이전 조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 전혀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있기 시작한 것이 1476년 즉 성종(成宗) 7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부터니까 그때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최고 300-400년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소상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주정씨도 최초의 가첩(家牒)인 월헌첩(月軒帖)이 약 1520, 즉 중종(中宗) 12년 전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려 중기의 정윤종을 시조로 적어놓은 것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권위 있는 보학자(譜學者)들의 주장도 왕실을 제외하고, 사가성(私家姓)의 시조추적은 그 상한선을 최고(最古)로 잡더라도 고려초기를 넘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만약에 그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 잡다한 기록을 해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100%가 다 날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702년경에 어느 타관 정씨(丁氏)가 특별한 목적 하에 정씨시조의 동래설(東來說)을 날조해서, 영광(靈光) 창원(昌原) 의성(義城) 나주(羅州) 등 본관이 서로 다른 여러 정씨(丁氏)들을 근거도 없이 무리하게 합쳐서, 한 조상 아래 여러 파계로 꾸며 합보(合譜)를 만들었다. 즉 당()에서 재상을 지내다가 압해도로 유배되어 왔다는 정덕성(丁德盛)이라는 가상인물을 도시조(都始祖)로 내세워 상계(上系)를 임의로 조작해 놓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한국 그 어느 나라의 정사(正史)에도 일언반구의 증거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날조행위였다는 것을 약 200년 전에 이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지난날의 선조 석학(碩學)들이 너무도 분명히 변증해 놓은 바가 있다.
최근에 와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 몇몇 권위 있는 학자들이 깊이 있는 연구를 해 놓은 것이 있다. 즉 이수건(李樹健)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한국의 성씨()와 족보연구>, 신천식(申千湜) 명지대학교 교수의 <진주 석갑산 고분군의 명문(銘文) 검토>, 김언종(金彦鍾) 고려대학교 교수의 <압해정씨의 가계무구(家系誣構) 변파>, 이민홍(李敏弘) 성균관대학교 교수의 <고대 나주권역의 역사와 압해도 고분군>, 안영상(安泳翔) 고려대학교 교수의 <다산 정약용의 조상의식>, 정범진(丁範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의 <당 원화(元和)10년 을미 진사30인 명단의 허구성과 정덕성에 대하여> 등이 곧 그것이다.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 온 예가 전연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역사에 기록이 있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밖에 중국에서 인물을 끌어와서 시조로 삼은 사례는 지난날 우리나라에서 조작된 흔히 볼 수 있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잔재(殘滓)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이미 토성분정(土姓分定)을 받은 우리로서는 이와 같은 시조 및 조상 날조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신빙성 있는 우리 조상들의 기록을 근거로 고려 중엽의 정윤종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3. 상계도(上系圖)
 
시조:정윤종(丁允宗)
 
2)혁재(奕材)3)()――4)()――5)()――6)공일(公逸)7)원보(元甫)
 
8)()――9)안경(安景)10)()――11)자급(子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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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수곤(壽崑)
13)()――      14)사업(嗣業)15)홍국(弘國) 화국(華國) 태국(泰國)
                           계업(繼業)15)충국(忠國) 의국(義國)
                           경업(敬業)15)여주(汝舟) 여즙(汝楫)
                           내업(鼐業)
                           승업(承業)15)충길(忠吉) 충열(忠悅) 충록(忠祿)
13)()——    14)윤업(胤業)15)순문(順文)
13)()——    14)신업(愼業)15)영효(榮孝) 우효(偶孝)
                      14)응업(應業)15)희간(熙侃)
13)()——    14)진석(璡錫)15)수국(守國)
 
12)수강(壽崗)
13)옥경(玉卿)14)응허(應虛)15)윤지(胤祉)
                          응진(應軫)15)윤구(胤球)윤순(胤順)윤극(胤克)윤욱(胤郁)
     옥형(玉亨)14)응두(應斗)15)윤조(胤祚)윤희(胤禧)윤우(胤祐)윤복(胤福)
                          응란(應蘭)—15)윤록(胤祿) 대수(大守)
     옥정(玉精)14)한방(漢房)15)-광립(光立)-명립(明立)-운종(雲從)
                          한류(漢柳)
                          한성(漢星)15)-경립(景立), 기립(起立), 승립(勝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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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안서(安瑞)
8)광서(光瑞)9)윤희(尹熙)10)극실(克實)11)사종(嗣宗)12)중경(仲敬)--
13)  
() —   14)숙근(淑謹)15)응시(應時) 응절(應節) 응운(應運) 응대(應代)
 
 
4. 세거지(世居地)-집성촌(集姓村)
 
나주정씨는 원래 토성으로 압해를 근거지로 당지의 호족(豪族)으로 살았다. 시조 정윤종 이래 제 6세 공일(公逸)에 이르기까지는 계속 압해에서 살았고, 분묘도 다 그곳에 있을 터이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다 실전된 상태이다. 그 후 제 7세 원보(元甫) 때에 이르러 검교호군(檢校護軍)이라는 실무가 없는 무관벼슬을 얻은 것을 계기로, 비로소 개경(開京)으로 올라와 개경에서 가까운 덕수(德水)로 옮겨 살았다. 거기서 자녀를 낳고 살았지만 지금은 분묘조차 찾을 수가 없다. 그 후 9세조 안경(安景) 때에 와서 배천(白川)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제 2의 세거지가 형성되고 분묘도 제대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나주정씨는 압해도에서 처음으로 출사(出仕)를 꿈꾸면서 상경하게 되고, 또한 그 후 점진적으로 사족화(士族化)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그 꿈을 상당히 이루어 드디어는 문중에서 이상(貳相) 서열의 고위 사환을 배출함과 동시에 한양(漢陽)을 중심으로 경기지방에서 세거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세거지는 자연 다음에 설명하는 세장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는 곳과 죽어서 묻히는 곳은 항상 대부분 같은 장소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 백 년을 거쳐 살아오는 동안, 자손들의 번창과 더불어 자연적으로 전국 각지로 분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서울을 비롯하여 배천(白川) 고양(高陽) 용인(龍仁) 분당(盆塘) 김포(金浦) 서산(瑞山) 공주(公州) 원주(原州) 영주(榮州) 예천(醴泉) 의성(義城) 영천(永川) 대구(大邱) 진주(晉州) 나주(羅州) 무안(務安) ………등등 전국 각지에 집성촌을 형성하였고, 전체 종원의 수는 약 5만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다.
 
 
5. 세장지(世葬地)-선영(先塋)
 
역대 세거지에 따른 세장지도 여러 곳 있는데 옛날에는 불과 10여 소에 그쳤으나 세월에 따른 종원의 증가로 말미암아 수 십 곳으로 확대되었다. 우선술선록에 나와 있는 선영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고 그 나머지는 대표적인 지명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압해(押海)관적지(貫籍地)
 
나주정씨의 관적은 원래 압해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압해는 목포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지금도 한 면소재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시조할아버지 정윤종(丁允宗) 이래 혁재(奕材) () () () 공일(公逸)의 여섯 할아버지가 대대로 여기에 터를 잡고 사시던 고장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본적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압해도는 그 규모와 지리적인 환경 관계로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었었다. 즉 왜구의 침입이나 전쟁 등으로 때로는 무인도가 된 적도 있었다.
조선조 성종 때, 노사신(盧思愼) 등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여지승람(輿地勝覽, 후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개편됨.)나주압해지(羅州押海誌) 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주의 고적(古跡)인 폐현 압해는 나주 남쪽으로 4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자는 압()으로도 쓴다. 본래부터 바다 속의 섬이다. 백제 때는 아차산(阿次山) 군이었다가 신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여전히 군으로 삼아왔다. 고려 초에는 나주에 속하였으나 후에 영광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그 후에 다시 나주에 귀속하였다. 그 후 땅을 잃은 적도 있지만 교민들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현으로 두었다. 산천이 바다를 압도하고, 섬 둘레는 60 리이며, 현의 기반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본 왕조에서 배출된 인물로 정수곤(丁壽崑)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교리에 이르렀고, 총명하고 기억력이 강해 문명을 날렸으나, 일찍이 사망하였다. 정수강(丁壽崗)은 수곤의 아우로 천성이 청렴 겸손하고,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또 관운공(觀雲公 丁時傑)께서 쓰신 <속적변(屬籍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압해(押海)는 호남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읍()의 이름인데, 이를 압해(壓海)라고도 쓴다. 신라 때는 실제로 군치(郡治)였으나 고려조로 내려와서 처음으로 군을 폐하고 영광으로 예속시켰다가, 후에 다시 나주에 예속시켰으며, 본 왕조에서는 이에 따라서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정씨는 원래 압해 출신이며, 압해는 바로 나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에 근거하여 말하더라도, 압해는 실제로 나주 땅이므로 나주를 취해서 관적으로 삼는다고 해서 실로 안 될 것은 없다. 다만 주현(州縣)의 연혁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훗날 만약에 압해가 다시 예속이 폐지되고 군치로 바뀐다든가 혹은 또 다른 군에 예속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주와는 상관이 없어지게 된다. 그때는 후손들이 이미 나주의 관적으로 습관이 되었는데, 다시금 압해의 옛 관적으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마도 세대가 더욱 멀어지면 압해가 옛 관적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종(吾宗)은 압해 말고도 영광 정씨가 있어 그들도 또한 명족이다. 영광 정씨들은 말하기를 애초에 정씨는 압해에서 나왔고, 그때 한 아들이 분리되어 영광으로 와서 살았기 때문에 영광 정씨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설은 고증된 바도 없고 근거할만한 것도 없다. 다만 영광과 압해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그럴 듯하게 들릴 뿐이다. 대개 압해는 일찍이 영광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 압해가 영광에 속하게 되자 영광을 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손 상승(相承)에 그 내력을 알지 못하고, 이에 분거(分居)해서 관적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 오늘날 오종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여 마치 영광 정씨들이 압해는 잊어버리고 영광을 얻어, 오직 영광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분거해서 관적이 되었다고 하거나 또는 이거(移居)하여 관적을 얻었다고 하면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이러한 인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문중 종인들이 직접적으로 압해를 관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압해를 관적으로 하게 되면 비록 백 번의 연혁(沿革)에도 압해는 곧 압해 그대로 남아 무사할 텐데 어째서 그렇게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근자에 우연히 문환()이 지은문씨보(文氏譜)를 얻어 보았더니 그 속적(屬籍)의 잘못이 마침 내가 의심하는 바와 서로 부합했다. 무릇 문씨는 관적이 철야(鐵冶)로 되어 있다. 철야는 옛날에는 능성(綾城)에 속하였다가 후에는 또 남평(南平)에 속하였다. 그 후에 와서 자손들은 능성과 남평 두 현으로 나뉘어 관적을 갖고, 철야 문씨는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이 전례를 거울삼을 만하다. 혹시 폐읍된 지명을 관적으로 부르기를 꺼려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해평 윤씨, 풍산 김씨, 덕수 이씨 등 이와 같은 성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의 관적이 어찌 다 오늘의 읍명(邑名)이겠는가?”
또 두호공(斗湖公) 정시윤(丁時潤)께서는 압해도 성묘를 마치고 <압해도 성묘기를(押海島省墓記)>를 지으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압해도는 고현(古縣)으로 지금은 나주에 속한다. 현의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정씨의 시조 이하 5-6 대 선조의 분묘가 있다. 산은 삼강(三岡)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강의 큰 무덤을 토박이 사람들은 정정승의 묘라고 전해 왔고, 그 동리의 이름을 정승동이라고 한다.
현의 서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는 봉수산이 있고, 그 산아래 일구(一區)의 정씨 묘가 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는 조수의 경치가 어울리고 줄지어 빛나는 별을 지계(地界)로 하고 있다. 대개 이 산맥은 다경포의 동쪽 나루터에서 바다로 수리를 들어가서 우뚝 솟아나 섬이 되었고, 가지가 생겨나고 잎이 돋아나 듯 일어난 것도 있고 엎드린 것도 있다. 그 중에 가지가 비틀거리듯 굽어져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6-7리쯤 되는 곳에 특별히 솟아 있는 한 봉우리가 있어 이를 홀산(笏山)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져 서남쪽에 있는 것은 봉수산이고, 서북쪽에는 여러 봉우리가 솟아나 기세가 제일 웅장하다. 그것이 가린관(佳隣串, 마을 이름)에 이르면 마치 새 날개를 크게 펼친 듯한데, 그 서쪽에 높이 솟은 산을 면전산(綿田山)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바로 정승묘의 외안산(外案山)이다. 그 서쪽으로 또 한 가지가 높이 솟아 봉우리가 되었는데 이를 단산(團山)이라고 하고, 이 산이 바로 정승묘의 내안산(內案山)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남쪽에서 서쪽으로 높이 솟아 성산(城山)이 되었고, 또 예쁜 산 몇 봉우리가 바다를 잘라서 마치 성곽처럼 정승동을 옹호하고 있으며, 그 중간은 바다이다.
내가 임신(1962)년 가을(康熙 31, 숙종 18)에 재상경차관(灾傷敬差官)으로 호남지방에 출장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1211일에 (압해도)성묘를 하였다. 이 때 여러 군현의 정씨들 다수가 함께 참여하였다. 지주(地主) 격인 나주목사 허지(許墀), 함평재 심방(沈枋), 무안재 안준유(安俊孺)가 각각 제수를 보내왔다. 이렇게 성황을 이룬 것은 모두 임금님의 은혜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압해는 서남해 안에 위치한 아름답고 작은 섬으로 우리 나주정씨의 관적지(貫籍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지금은 관적도 나주로 바뀌었고, 더더욱 안타깝고 민망한 것은 그곳에서 시조 이하 여러 대의 분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관운공의 말씀대로 나주를 본적으로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러나 압해로 본적을 되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간절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하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이제 와서 그 문제를 제기한다면 행정적 절차라든가 또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꾸어야 하는 데에 따른 불편과 어려움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관적지에 대한 유래만은 분명히 알아두되, 어쩔 수 없이 이대로 나주정씨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생각한다.
덕수(德水)
 
압해(押海)에 이어서 다음으로 오래된 우리의 세거지는 덕수(德水)이다. 시조 이후 제 7세조(元甫)는 검교호군이란 비교적 낮은 직책을 얻어서 처음으로 압해에서 그 당시의 서울이던 송경(松京, 開城)의 남부에 위치한 작은 고을 덕수(德水)로 옮겨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37녀를 낳고 살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고 그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측된다.술선록에 의하면 관운공(觀雲公, 諱時傑)이 일찍이 여러 문중의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선세(先世)의 분묘가 실제로 덕수에 소재(所在)한다고 했으나 끝내 그곳을 알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 당시에 이미 분산(墳山)을 실전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지금은 남북이 가로 막혀 오갈 수도 없는 형편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통일의 그날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다.
 
배천 강서(白川江西)
 
강서는 황해도 배천 전포(錢浦)의 물가에 있고, 지명은 지혜동(智惠洞)이다. 강서사(江西寺)로부터 5-6리 남짓 떨어져 있고, 국세(局勢)가 엷고 물가이다. 이곳은 세장지 즉 선영으로 전해오는데, 거기에 세거지가 함께 있었는지 아니면 좀 멀리 떨어져서 세거지가 있었는지는 지금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술선록에 의하면, 이곳 강서 선영의 형상은 청룡의 외각이 포중으로 들어와 잠겨있고, 묘의 앞으로는 조수(潮水)가 드나들며, 절 뒤의 산봉우리는 원만히 우뚝 솟아 묘정(墓庭)을 호위하고 있어, 역시 문을 막고 파도의 출입구를 굳게 잠그고 있는 형상을 짓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배천군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 절 앞에 이르러서는 포()와 합쳐지니 이곳이 곧 두 줄기 물이 만나는 곳으로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이라고 했다.
강서에는 제 9세조(安景)과 배() 반부인(潘夫人), 그리고 제 10세조()가 모두 여기에 묻혀 있다. 나중에 관운공의 조고(祖考, 好敬)와 부인 정씨(鄭氏)도 역시 여기에 묻혔다.
술선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평시에 산내(山內)에 묘전(墓田)을 마련해 두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난리를 겪는 동안 절의 승려가 이를 차지하여 강제로 사위토(寺位土)로 삼아버렸는데, 내 아우 시술(時述)이 기해년 겨울에 관가에 고소하여 다시금 묘전으로 복구시켜 놓았다.”“시술이 이 송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해년에 군수 윤상(尹商)이 도사(都事) 홍주삼(洪柱三)에게 말해서, 동시에 직접 심문(審問)하고 측량하여, 밭은 묘()에 귀속시키도록 결판을 내리고, 또 승인(僧人)이 짓고 있던 위전(位田)에 대해서는 실상을 조사하여 절로 돌려주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배천 율학(白川栗壑)
 
율학도 세장지 즉 선영이다. 율학은 전포(錢浦)의 하류, 벽란(碧瀾) 나루의 서쪽에 있고, 나루에서 10리 거리에 있다. 역시술선록의 기록에 의하면, 오른 쪽에는 정명사(正明寺)가 있고, 앞으로는 봉수봉(烽燧峰)을 대하고 있는데 그 활 모양으로 휘돌아 감긴 산세는 강서(江西) 묘지와 대략 비슷하다고 했다.
그리고 강서와 율학 두 길지(吉地)는 정명사의 상인(上人)이 내리신 땅으로, 그 일화가술선록의 기문(記聞) 중에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0세조 휘 )이 배천의 용청방에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송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담낭을 휴대하고 길가에 서 있는 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정명사에 사는데 절로 돌아가려고 한다면서 그 담낭을 공의 짐 속에 잠시 맡기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은 언짢은 기색도 없이 바로 받아서 짐 속에 실어주었다. 그리고 벽란도까지 함께 갔다. 물을 건너서는 두 길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음으로 공은 담낭을 돌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스님이 하는 말이 여기서 절까지는 7 리도 못 남았는데 절문 앞까지는 가져다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해서 공은 또 그의 말대로 가져다주었다. 절 앞에 이르러 공은 담낭을 내어주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스님은 날도 곧 저무니 공께서는 우리 승방에서 하룻밤 쉬어서 내일 새벽에 떠나도 좋을 텐데요.” 하면서 은근히 붙잡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머물게 되었고, 스님은 공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공에게 말하였다. “담낭을 부탁한 것은 그저 시험해본 것일 뿐입니다. 빈도는 감여술을 좀 익혔는데 이 부근에 명당이 있기에 덕망 있는 분이 나타나면 드리고자 했습니다. 조금 전 길에서 공을 시험한 것처럼 똑같이 다른 사람도 시험해 보았지만 두 번씩이나 곤욕만 당하였지 공처럼 담아서 가져다준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며, 공께서는 절까지 가져다주었으니 덕망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바로 이야기했던 명당자리를 가르쳐주었다. 지금의 율학장지가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공의 부인 이씨, (), 교리(校理)가 모두 이곳에 매장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강서도 역시 이 스님이 지정해중 묘지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공은 부인과 두 곳으로 나뉘어 매장되었다고 한다.수촌록에 의하면 강서와 율학은 30리 남짓 떨어져 있는데, 토착민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말로는 어떤 스님이 두 곳을 지적해준 것이라고 했다.”
율학에는 10세조(諱 衍)와 부인 이씨, 소격서령(昭格署令, 諱子伋)과 부인 황씨 및 교리공(校理公, 諱壽崑)이 모두 여기에 묻혀 있다. 벽란도(碧瀾渡)에서 정명사까지는 10여 리 거리이고, 강서와 율학 사이는 20여 리 떨어져 있다. 훗날 호제(好悌)와 그 부인 유씨(兪氏) 이씨, 그리고 언경(彦瓊) 언성(彦珹) 등 조상들이 모두 이 산내(山內)에 매장되었다.
 
토당(土堂)과 무원(茂院)
 
토당과 무원은 실은 이미 없어진 세장지다. 198810월 경기도 고양시 토당 무원에 있던 우리 선영이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수용됨에 따라 그 곳에 있던 우리 선조들의 18기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 양지에 있는 제일리로 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세장지에 관한 것을 자손으로서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두 곳의 옛 모습을술선록의 기록을 참고하여 소개해두고자 한다.
이 두 선영은 고양(高陽) 관내 행주(幸州)의 남쪽, 도당산(都堂山) 아래에 있다. 산세(山勢)는 한이산(漢妳山)에서 뻗어나 10여 리쯤에서 여석현(礪石峴)을 지나고, 또 몇 리를 가면 성라산(星羅山)이다. 거기서 또 10여 리를 가서 소장현(少壯峴)을 지나면 곧 활처럼 굽어지고 오른 쪽으로 돌면 문득 성봉(星峰)이 솟았는데 이것이 도당산(都堂山)이다. 도당산의 서쪽이 토당(土堂)이고, 동쪽은 무원(茂院)으로 양 국세(局勢)로 나뉘어져 있다.
술선록에 의하면, 토당에는 월헌공(月軒公)과 부인 김씨의 쌍묘가 있었고, 진좌(辰坐) 술향(戌向)이었으며, 많은 자손들이 따라서 여기에 묻히게 되었다. 옥경(玉卿)과 부인 박씨, 응허(應虛)와 부인 권씨, 윤지(胤祉)와 부인 홍씨, 호서(好恕)와 부인 신씨(申氏)”가 다 여기에 매장되어 있었다.
무원에는 공안공(恭安公)과 부인 김씨가 합장되어 있고, 이상공(二相公)과 부인 송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모두 미좌(未坐) 축향(丑向)이며, 많은 자손들이 따라서 여기에 묻히게 되었다. “윤조(胤祚)와 부인 윤씨, 윤우(胤祐)와 부인 심씨(沈氏), 호인(好仁)과 부인 신씨(申氏) 한씨, 호약(好約)과 부인 김씨, 호예(好禮)와 부인 이씨, 호겸(好謙)과 부인 안씨, 호양(好讓)과 부인 김씨, 호근(好謹)과 부인 윤씨, 시설(時卨)과 부인 이씨가 다 여기에 매장되어 있었다.
광주의 낙생(廣州樂生)
 
광주(廣州)의 남쪽 낙생리(樂生里)에 있고, ()에서 40여 리의 거리이다. 용세(龍勢)는 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내려와, 묘역으로 들어올 때 먼저 산협을 지나는 곳이 바로 서울 한양에서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큰길이다. 그 이름은 유현(楡峴)이고 협곡을 자나면 문득 솟아나서 주봉(主峰)이 되는데 그 주봉으로부터 점차 엎어져 차츰 내려오면서 4-5 번쯤 꺾이면 바로 신좌(申坐) 인향(寅向)의 언덕으로, 즉 감사공(監司公)과 부인 정씨(鄭氏)가 합장되어 있는 곳이다. 묘 앞 냇물은 탄천(炭川)이며, 청룡의 어깨 이름은 자은유이현(慈隱踰伊峴)이고, 그 고개를 넘어 고개 서쪽이 바로 판교(板橋)의 대촌(大村)이다.
 
충주의 단월(忠州丹月)
 
단월 선영을술선록의 기록을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단월은 충주의 남쪽 10리 남짓 지나, 달천수(達川水)의 동쪽, 주지원(注之院)의 북쪽에 있다. 산세(山勢)는 주룡(州龍)으로부터 맥()이 나누어져서 내려와 달천에 이르러 회결(回結)된 곳이다. 막 묘역으로 들어오려는 곳은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가 북서쪽으로 떨어지면서 형세가 활처럼 굽어 돌 때, 목을 막은 듯 조용히 협곡을 지나면 연거푸 몇 봉우리가 솟아,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지만,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묘터가 이루어지고, 용이 고개를 돌려 조상을 돌아보는 형세가 되어 있다. 유좌(酉坐)에 묘향(卯向)이다. 여기에는 관운공의 선고(先考) 감찰부군과 선비(先妣) 남씨의 두 방 한 무덤의 합장이 있다. 뒤에 둘러싸인 장막은 주봉이 끝나기 전에 멈춘다. 국내(局內)에서는 손진(巽辰: 손은 동남 사이, 진은 동동남. 역자주) 방향의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앞서 우뚝 솟았다고 말한 산으로 실조산(實祖山)이다. 주봉은 단아하면서 그렇게 높지 않고, 백호가 끝나는 곳에는 돌이 있어 햇빛에 빛나고, 손사(巽巳: 동남방향. 역자주) 방향에서 물이 흘러나와, 돌아서 사방(巳方: 정남에서 동으로 30도 방향. 역자주)으로 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달천수(達川水). 동남쪽으로 물이 보이는 곳이 바로 높은 절로 올라가는 돌길로 제법 험한 조령(鳥嶺)의 대로이다. 단월역(丹月驛)은 서쪽으로 1리 남짓한 곳에 있고, 주지원(注之院)은 옛날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졌는데, 그 유지(遺址)는 바로 묘역 위에서 보인다. 다만 주지(注之)와 단월(丹月)은 주()로부터 공히 10리 거리에 있었으나,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단월은 주()에서 10리이고, 주지원은 16리라고 한 것을 보면, 주지원은 옛날에는 좀 멀리 있다가 후에 이곳으로 옮겨왔음을 뜻하지만 여전히 유지로 남고 말았다.
 
이상 관적지인 압해, 즉 첫 번째 선영을 비롯한 일곱 군데의 성영을 제외하고, 근자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우리 나주정씨의 세거지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 세장지도 많이 불어났는데 그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충북 음성군 원남면의 조촌리 2)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면 부제곡
3)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대야리 4)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5)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6)경기도 용인 포곡면 전대리 부곡
7)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동 8)충남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북록
9)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사악 10)충남 천안시 불당동 후록
11)경북 울산군 두서면 복안리 12)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양상리
13)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14)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관산리
15)경북 청도군 금천면 동곡동 선자등 16)경북 문경군 갈벌 탑거리
17)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법천리 곡촌 18)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학의리 필동
19)경기도 개성군 서면 광정리 20)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선도동
21)경북 영주시 상줄동 금당 22)경북 영주시 상줄동 여아
23)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야동리 24)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무송리
25)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유리 26)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27)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막리 28)경북 예천군 감천면 궁현동
29)경북 선산군 해평면 송곡동 30)충남 서천군 화양면 기복리
31)강원도원성군 부론면 법천리 개치동 32)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마현
 
이 중에서 경기도 고양시 지도면 일대에 있던 분묘는 지난 1988년에 도시계획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모두 경기도 양지(陽智)의 제일리(霽日里)로 이장하였다. 제일리에는 그 해 대규모의 선영(先塋)을 새롭게 조성하여 시조의 제단을 위시하여 월헌공 정수강(丁壽崗), 문화공 정옥경(丁玉卿), 공안공 정옥형(丁玉亨), 첨정공 정옥정(丁玉精), 참봉공 정응허(丁應虛), 충정공 정응두(丁應斗), 우봉공 정윤지(丁胤祉), 전첨공 정윤조(丁胤祚), 병사공 정호서(丁好恕), 별제공 정호인(丁好仁)과 그 배위를 다 함께 모셔 놓았다. 그래서 나주정씨의 또 하나 새로운 선영(先塋), 즉 영적(靈的)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6. 역대 족보에 대한 설명과 그 전승표
 
①《월헌첩(月軒帖)
 
월헌첩은 월헌공께서 기록해 두셨던 가첩(家牒)으로, 우리 나주정씨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된 보첩(譜牒)이다. 그러나월헌첩은 일찍이 실전되어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면모를 볼 수가 없다. 연대는 아마도 월헌공께서 1527년에 돌아가셨음으로 1520(중종15)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그러나 관운공께서 쓰신술선록(述先錄)등에 남아 있는 기록과 인용문구로 미루어 봐서 그것이 어떻게 발견되었고, 내용은 대체로 어떤 것이었으며, 분량은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대략은 알 수가 있다.
관운공은술선록(述先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다.
숭정(崇禎) 무인년 추 8월에, 내가 강서(江西, 즉 황해도)로 가서 성묘를 마치고 곧 바로 병이 나서, 읍촌(邑村)에서 10여일 지낸 다음, 틈이 있어 이웃에 사는 전 군수 이각(李恪)을 찾았었다. 이각은 곧 선조 월헌공(月軒公)의 외 4대 손으로, 그 집에 월헌공의 첩자(帖子)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날 구경할 수가 있었다. 이 첩자에서 월헌공 위로 선대(先代)의 휘신(諱辰) 및 소격서령(昭格署令)의 이력을 아주 상세히 알 수 있었고, 그리고 외 선조의 분산(墳山)과 기일(忌日) 또한 상당 부분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모두 우리 집에는 이전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첩자를 내게 줄 수 없느냐고 청해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월헌공이 그에게는 월헌공의 장자인 문화공 계통으로 외고조가 되는데, 그 수적(手跡)이 또한 이 첩자에 있었기 때문에 빌리지는 못하고, 다만 그 글을 베껴 와서 이제 이 책에 아울러 기록해 두는 바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관운공이 전 군수 이각(李恪) 댁에서월헌첩을 열람하고 그것을 초사(抄寫)해 와서술선록을 지을 때 많이 참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밖에도 수촌공(諱彦璿)<수촌록서문(水村錄序文)>에 보면, 선세(先世)의 행적과 이력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가보(家譜)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유실했다고 하였고, 또 감사공(諱允祐)에게도 가보를 기록해 놓은 것이 있었는데 화재로 말미암아 대부분 소실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보란 다월헌첩을 근거로 해서 거기에다 근래의 가족현황을 첨가해 놓은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관운공 이후에도월헌첩은 또다시 실전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제6세조(公逸)에 이르는 선조님들의 사적은술선록에서 보듯이 비록 간략하기는 하지만월헌첩의 기록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관운공께서도 상계선조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월헌첩에는 처족에 대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특색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역시 간략한 가첩에 불과했었음을 알 수 있다.
 
②《첨정첩(僉正帖)
 
이 보첩은 첨정공(諱玉精)께서 작성해 놓았던 것으로 보이나 일찍이 실전되고 전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다산공의 <압해정씨가승> 10세조(諱衍)를 설명하는 곳에서僉正帖云: 生二男一女 男子伋, 次夭, 女適大卿李貴生.”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과거에첨정첩(僉正帖)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보기(譜記)
 
이는 감사공(諱胤祐)께서 기록해 두었던 일종의 가첩(家牒)으로, 수촌공(水村公, 諱彦璿)께서수촌록(水村錄)을 집필할 때 저본(底本)으로 삼으려 했던 필사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화재로 거의 타버리고 말았으니 그 내용이나 형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④《수촌록(水村錄)
 
수촌록(水村錄)은 수촌공 언선(彦璿)께서 초암공(草菴公, 諱胤祐)께서 보관하고 있다가 화재로 타버린보기(譜記)의 잔재를 주워 그 불완전한 것을 근거로 내용을 첨가하여 쓴 보록(譜錄)인데, 애석하게도 상재하지도 못하고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서문만은 남아 있어서 다소나마 그 내력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서문은 다음과 같다.
<수촌록서어(水村錄敍語)>
 
옛날에 선세(先世)의 행적(行蹟)과 이력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가보(家譜)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의 전쟁 중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대부(大父)인 감사(監司) 윤우공(允祐公)은 왜란 전에, 나아가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내셨는데 공께서도 가보를 기록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관사(官舍)에서 지니고 있었다. 왜적이 물러간 후 공은 서울로 돌아와 동문(東門) 밖 시골별장에 사셨고, 언선(彦璿)도 어버이를 모시고 선영(先塋) 아래에 와서 살게 되어, 이 때 대부에게 그 가보를 베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아뢰었으나 그 해 7월에 대부님 댁이 갑자기 화재를 당해 집에 있던 물건들이 모두 타버렸다. 타다 남은 가보를 잿더미 속에서 수습해 보니 문장에 소실(燒失)된 부분이 많았다.
공안공(恭安公) 할아버지는 비문(碑文)과 지문(誌文)이라도 있어서 근거해 볼 자료가 있지만, 그러나 찬성(贊成) 할아버지는 가보는 불에 타서 훼손되고, 비지(碑誌)는 아직 이루어 놓은 것이 없으니 후손들이 상고할 자료가 없어지고 만 것이다. 감사공 대부께서는 틀림없이 상세히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병환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영남(嶺南)으로 낙향해 가시니 멀리 떨어져 있어 아뢰어보지도 못하고 있던 중, 대부께서 그만 졸지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리하여 찬성공의 평생이력과 두터운 명성 그리고 오래도록 쌓아온 덕망은 다 버려져 전해오지 않으니, 이는 후손들로 하여금 공의 그 밖의 풍도(風度)에 대해서 알 수 없게 한 참으로 통탄(痛嘆)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난리가 끝난 후에 각기 여러 사람이 들은 말을 수집하여 이로써 비지(碑誌)를 구성하니 대체로 후대에 전할 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자(宗子)는 미약하고 가난하며, 여러 자손 가운데 관직에 있는 자는 또한 관심을 두지 않으니, 참으로 하고자 하는 추세는 형성되어 있으면서도 결국은 이루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아버지와 당내(堂內) 종반들은 모두 이미 돌아가시고, 언선의 나이도 79세로 쇠퇴하여 곧 죽게 되었으니, 이 또한 가운(家運)이라 통탄할 따름이다.
숭정(崇禎) 무진 12월 그믐날
사손(嗣孫) 언선 근서(謹序)
 
이 서문을 읽어보면 참으로 애석하고 애처로운 심정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보기(譜記)를 열람하고 초사할 수 있었던 기회를 번번이 놓쳐버리고 결국은 화재로 타 없어지게 되고 말았는지 정말 운명의 장난 같은 불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만약에 그때 그 보기라도 완전하게 초사해서 후세에 전했었다면 지금 우리는 좀 더 상계 조상에 대한 상세한 사실을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라도 좀 더 여유 있고 좀 더 재력 있는 자손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족보문제에 접근했었다면술선록보다도 수십 년 앞선 그때 이미 훌륭한 보록이 나올 수 있었을 터인데 그때 집안 어른들도 모두 돌아가시고, 수촌공 자신도 이미 79세의 고령이라 족보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음을 통탄하였으니 지금 우리 후손들이 곰곰이 생각해 봐도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⑤《나주정씨술선록(羅州丁氏述先錄)
 
나주정씨술선록의 원 이름은나주압해정씨술선록(羅州押海丁氏述先錄)이다. 줄여서 흔히나주정씨술선록또는정씨술선록이라 부르고, 우리 문중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술선록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술선록은 조선조 현종(顯宗) 1(1660)에 직산현감(稷山縣監)을 지내신 관운공(觀雲公, 時傑)이 편찬한 일종의 보록(譜錄)으로, 여기에는 시조(始祖) 고려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允宗)으로부터 관운공 자신에 이르는 18세대의 세계(世系)를 편찬인의 직계위주(直系爲主)로 비교적 상세히 기술해 놓은 우리 문중의 귀중한 가보(家譜)이다.
한 가문의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역대 가족의 명자(名字) 생졸(生卒) 장지(葬地) 관력(官歷) 배우(配偶) 자녀(子女) 등을 대대로 간략하게 적어놓은 것을 대체로 가첩(家牒)이라 하고, 그 가첩을 확대시켜, 종족(宗族)의 세계(世系)를 망라해서 책으로 엮어놓은 것을 족보(族譜)라고 한다. 우리 종중(宗中)에서 예를 들자면 전자는월헌첩(月軒帖)과 같은 것이고, 후자는해영보(海營譜)》《순천보(順天譜)이래로경오보(庚午譜)》《신미보(辛未譜)》《신축보(辛丑譜)》《기묘보(己卯譜)가 그것에 해당한다.
그런데술선록은 시대로 보아도 전자와 후자의 중간이며, 또 내용이나 체제로 보아도 그 중간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첩()보다는 상세하고 족보보다는 간략한 기록물로서 족보를 아직 종파 항열 및 세대 별로 도표화 하는 방식을 채택하지는 않고, 오직 설명문으로 일관하는 형식인데, 이와 같은 것을 대체로 보록(譜錄)이라고 한다. 보록은 종족 전체의 세계(世系)를 망라해서 골고루 엮지 못한 결점은 있지만, 그러나 그 대신 인물의 성품이나 덕망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좀 더 흥미롭게 조상에게로 다가갈 수 있게 함으로써 조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물론, 조상을 더욱 숭배하고 경모(景慕)할 수 있는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 데에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술선록은 상계(上系) 부분에 대해서는 주로월헌첩에 의거했고, 선조에 관한 일화(逸話) 등은수촌록(水村錄), 그리고 외척(外戚) 부분에 대해서는수촌록원파록(原派錄)을 참고하고 있다. 그러므로월헌첩은 시조 이하 11세 소격서령(昭格署令, 子伋)에 이르는 선조들의 휘신(諱辰) 이력 및 외선조의 분산(墳山) 기일(忌日) 등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한편수촌록은 특히 일반 족보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에 얽힌 이력이나 일화 등을 소개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으며, 원파록은 또 외 선조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는 데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또 한편으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던 소문도술선록찬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술선록은 기실 관운공의 선친 감찰공(監察公, 彦珪)이 앞서 이미 많은 부분을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여기에다 관운공은 여러 종파의 후예들을 탐문하여 후생자(後生者)를 추가하는 등, 3분의 1 정도를 증보하여 지금의술선록을 완성하였다. 이 때 관운공의 아우 전부공(典簿公, 時述)은 족백부(族伯父, 彦璿)수촌록을 그의 손자 남일(南一)로부터 얻어 와서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하였고, 원파록(原派錄)을 작성하여술선록작성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원파록은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구첩(舊牒)에다 타보(他譜)의 내용을 보충하여 만든 것으로 본종(本宗) 뿐만 아니라 외계(外系)까지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었다. 전부공은 그 후 보학(譜學)에 조예가 깊어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가 되었으며,선원록(璿源錄)을 교정했고,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를 편찬하기도 한 그 당시 보학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러니까술선록이 이루어지기까지는월헌첩》《수촌록》《원파록그리고 전문(傳聞) 등에서 많은 자료를 참고 또는 인용하였고, 특히 감찰공과 전부공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기여(寄與)가 컸었다는 사실을 짐작해서 알 수가 있다.
한편 아쉬운 점이 있다면월헌첩이나수촌록의 전체를 수록해 두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그 귀중한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점이다. 그러나 관운공은 범례의 마지막에서 이르기를보록 중에서 마침 타다 남은 몇 단을 얻기는 하였으나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음으로, 그 해독할 수 있는 부분만을 절취하여 여기에 붙여두는 바이다.”라고 한 말로 미루어보면, 그 나머지는 모두 훼손되어 해독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 그 두 자료의 윤곽만이라도 알 수 있다는 것은 관운공의 덕택이며, 무척 다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술선록월헌첩》《수촌록등 귀중한 기록이 다 일찍이 망실된 마당에, 우리가 하마터면 영원히 잊어버릴 뻔했던 대장군 이하 약 11세에 걸친 선조들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의 상당부분을 보존해서 전해주었고, 뿐만 아니라 후세에 와서 우리 정씨 문중에 제대로 갖추어진 족보가 나올 수 있도록 기초 작업을 확고히 해놓았다는 사실은 특기해야 할 것이며, 이는 실로 크나큰 공헌이요 역할이었다.
술선록은 관운공 스스로 범례에서 언급했듯이 자기 직계 세대를 위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본종(本宗)의 세계(世系)를 간단히 기록했을 뿐이지, 족보를 다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직계 본종은 비교적 상세하고 기타 방계는 소홀히 한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점은 장단점을 논하기 전에 그 당시의 여건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술선록은 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한 판본인데, 그것이 초간본인지 중간본인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조선조 숙종 34(1708)에 두호공(斗湖公, 時潤)이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당지에서술선록을 간행하고 중간기(重刊記)를 썼다.(족보 권1 참조) 이 중간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그 전에 초간본이 있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관운공이술선록서문에서 언급한대로 초고(草稿)를 몇 벌 등사해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이와는 따로 소책자를 만들어 책이름을술선록이라고 붙였다고 했는데, 이때의 일을 1차 간행한 것으로 간주하고, 중간기를 쓴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언하기가 어렵다. 만약에 그 전에 초간이 있었다면 중간이라고 해야 되겠지만, 관운공은 분명히베껴서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는 간행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뒤 바로 여건이 호전되어 초간본을 간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속서(續敍)’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필사본으로 있던 것을 다시 정리하여 처음으로 간행하고 이때에 <속서겸례(續敍兼例)>를 붙인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한편 두호공의 중간기를 보면 전자에 관운공이간행하여 여러 자손들에게 반포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현존하는술선록이 곧 두호공이 중간한 판본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보기에는 여러 가지 모순과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는 중간기(重刊記)가 거기에 붙어있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두호공은 중간기에서,술선록에 실린 행장이나 이력이 본친(本親)은 상세하고 방친(傍親)은 간략하기 때문에 간략한 곳은 상세하게, 그리고 빠진 곳은 보충해서(詳其畧而補其闕)” 중간한다고 썼지만 자세히 살펴봐도 그렇게 한 흔적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며,
셋째는 심지어 자신의 직계인 대사헌공(大司憲公, 胤福) 동원공(東園公, 好善) 교리공(校理公, 彦璧)으로 이어지는 3대에 대해서도 다른 방계에 비해서 뚜렷하게 보충해 놓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며,
넷째로 만의 하나 이것이 두호공의 중간본이라면 서문이든 범례이든 발문이든 어딘가에 발간경위와 아울러 보충한 부분에 대한 중간한 사람의 좀 더 상세한 설명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술선록은 관운공이술선록을 쓴 그 해로부터 불과 몇 년 안에 간행된 초간본일 것이라는 추정을 감히 해본다. 그것은 또 처음에 등사(謄寫)한 그대로의술선록이라고 보기에는 그 내용과 체제가 훨씬 잘 짜여 졌고, 서문을 비롯한 권두(卷頭)의 문장들이 의외로 잘 갖추어져 있으며, 그리고월헌첩수촌록을 입수해서 참고한 경위와원파록을 참고한 일, 또 편집할 때의 책의 체제 등에 대한 설명이 모두 <속서겸례(續敍兼例)>에 너무도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애초에 주로 감찰공이 만들어 놓은 족보에다가 스스로 약 3분의 1가량의 분량을 추가하여 등사하였던 것은 바로술선록의 최초의 초사본(抄寫本)이었고, 그 후 간행여건이 좋아져서 오래 전에 입수한수촌록과 아우의원파록을 참고하고, 여기에 분산에 관한 선산도(先山圖)를 잘 그려 넣어서, 다시 잘 편집된 1권의나주압해정씨술선록을 간행한 것이 바로술선록최초의 판본인 현존하는술선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속서겸례>에서 판본의 체제에 대해서 그렇게 상세하게 잘 설명되어 있을 리가 없고, 술선록<서문>에서는 다만몇 권을 베껴서 형제들과 나누었다.”고 하였지만, 두호공의 중간기에서는간행하여 여러 자손들에게 배포하였으니 그 우리 가문에 세운 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술선록은 그 전에 이미 한 차례 간행하여 널리 배포한 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 후 약 40년 뒤에 두호공은술선록이 귀해지고 자손들은 불어나자, 바로 이 초간본에 내용을 다소 증보하여 중간하고, 이 때 중간기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중간본을 지금 찾아볼 길이 없으니 참으로 궁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쨌든술선록의 판본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좀 더 두고, 자료를 더 찾아내어 연구해 봐야할 과제인 것 같다.
술선록은 원래 지금의 일반 종원들은 독해하기가 쉽지 않은 한문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고 싶어도 일독(一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20038월 우리 종회에서는 종원 그 누구나 쉽게 읽고 깨우쳐서 우리 선조에 대한 이해와 나아가 경모(景慕)의 심정을 돈독히 할 수 있도록술선록을 한글로 번역해서 배포하였다. 그때의 번역은 바야흐로 선계(先系) 문제에 관하여 여러 가지 억측과 이론(異論)이 난무하고 있을 때에, 종원들이 우리 상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정확한 인식을 하기 위하여 특별히 시도된 작업이었다.
 
끝으로 근자에 타성 정씨들이 엉뚱하게도 영남대학 도서관에서 이른바초암공술선록이라고 하는 책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우리 시조에 관한 위조된 기록을 제시한 일이 있었는데, 참으로 허무맹랑하고 가소로운 날조행위로 밖에 볼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도 어불성설이지만,술선록은 이 세상에 단 한 종류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더욱이초암공술선록이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책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런 책이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책자에 고의로 따로 몇 장 당치 않은 내용을 따로 만들어서 책미(冊尾)에 붙인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종원 여러분은 그런 위작된 자료에 현혹되지 말기를 특별히 부탁하는 바이다.
다음은술선록의 서문인데 참고로 아래에 첨부 소개한다.
옛날 종법(宗法)이 수립되고 나서 국가가 존엄해졌고, 삼대(三代=夏殷周)가 흥성했을 때 이 법을 가장 중히 여겼다. 그래서 서민으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각 그 종문(宗門)을 세워 거기에서 여러 족친(族親)들을 통솔하였다. 그럼으로 대종(大宗) 지종(支宗) 소종(小宗)의 차별이 생겨나고, 대종 소종이 분명해진 가운데 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후세에 와서 이 법이 폐지되자 사족(士族)들은 집집마다 세계(世系)를 밝혀서 이로써 종파(宗派)를 구별하고 그것을 족보(族譜)라고 했으니 이 어찌 종법(宗法)이 남겨놓은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세록(世祿)을 받아온 가문에도 보()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양이 적으면 첩()으로 만들고, 그 양이 많으면 펴서 권()으로 만들었으며, 권보(卷譜)는 책으로 간행하는 자가 많았다.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인(倭人)들의 화를 크게 입어 전국이 고르게 전쟁의 피해를 보았고, 이 때 보첩(譜帖) 같은 것은 대개 없어지고 말았다. 선친께서 난리가 평정된 뒤에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세계(世系)를 가지고 여기에 또 여러 종파(宗派)의 후예(後裔)를 찾아내어 족보를 만들었었지만 불행히도 또 병자년 청인(淸人)의 난을 맞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의 외종제 권론(權碖)이 일찍이 한 권을 필사하여 우연히 보관해서 잃지 않고 있었다. 시걸이 그것을 다시 취하여 수정하고, 그 이후에 출생해서 아직 수록하지 못한 자를 추가했더니 그 전 보()에 비해서 거의 삼분의 일이 불어났다. 이 때 대략 완성된 것 같아서 판각(板刻)을 하려고 했지만 물력(物力)이 다 준비가 안 되어서, 잠시 몇 권을 베껴서 여러 형제들에게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또 난리가 잦은 이때에 책자가 좀 커서 보관하기가 어려운 점을 염려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별도로 작은 책자를 만들어 거기에 다만 세계(世系)를 취하되 분파(分派)에는 간략하게 하고 오로지 선대(先代)의 연수(年壽) 이력(履歷) 기신(忌辰) 장지(葬地) 등은 상세하게 적고, 또 그 밑에는 행적(行蹟)을 간략하게 붙였다. 그리고 옛날의 소위 가승(家乘)이란 것을 본받아 제목을술선록(述先錄)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비단 기록한 자가 휴대하기에 간편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비록 한쪽 것(큰 책=원본)은 잃더라도 다른 한쪽 것(작은 책)은 보존하자는 의도이기도 하다. 나의 후손들은 이런 뜻을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경자년 정월 13
통훈대부행직산현감(通訓大夫行稷山縣監)
시걸(時傑) 근서(謹序)
 
⑥《해영보(海營譜)
 
이 족보는 표제가나주정씨해영보(羅州丁氏海營譜)또는나주압해정씨족보(羅州押海丁氏族譜)로 되어 있으나 통상 줄여서해영보(海營譜)라 부르고 있다. 조선조 숙종 3(1677)에 해백공(海伯公, 昌燾)이 해서(海西), 즉 황해도의 안찰사로 있을 때 약간 권(30)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애초에 전부공(典簿公, 時述)께서 각 파의 보계를 수집하여 일부를 작성해 두었던 것을 그의 질자(姪子) 되시는 해백공께서 간행하신 것으로 원래 작성자는 상당 부분 전부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전부공이술선록(述先錄)이 나오기 전에 이루어 놓았던원파록(原派錄)이 그 원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술선록에 의하면,원파록은 전부공이 집에 소장하고 있던 구첩(舊牒)이 비록 내외 세계(世系)를 아울러 기록은 하였으나 외선조(外先祖)에 대해서는 미진하였음으로, 따로 타보(他譜)를 취해서 증수(增修)하였으며, 본종(本宗) 뿐만 아니라 외계(外系)에 대해서도 대단히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해영보에는 위로 시조 고려 검교대장군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도자(燾字) 또는 도자(道字) 항렬에 이르기까지 18세대의 세계(世系)를 본종이나 외계를 특별히 차별하지 않고 자세히 기록하였고, 그 말미에는 <선세비갈문(先世碑碣文)>이란 제하에,
1)소격서령갈음문(昭格署令碣陰文) 증손 응두(應斗)
2)월헌공갈음문(月軒公碣陰文)
3)공안공신도비명병서(恭安公神道碑銘幷序) 홍섬(洪暹)
4)공안공묘지명병서(恭安公墓誌銘幷序) 정사룡(鄭士龍)
5)정부인김씨묘명(貞夫人金氏墓銘) 정사룡 찬
6)이상갈음문(貳相碣陰文, 忠靖公碣陰文)
7)고암갈음문(顧菴碣陰文)
8)대사헌공갈명(大司憲公碣銘)
9)승지공묘갈문(承旨公墓碣文)
10)감찰공묘갈문(監察公墓碣文)
등을 싣고 있다.
그리고 끝에는 편찬자(丁昌燾)가 병진(1676)년 겨울 황해도 관찰사를 배수(拜受)한 일로, 돌을 채취하여 글을 새긴 사유(事由)를 간단히 덧붙여 놓았을 뿐 기타 서문이나 발문 등은 보이지 않는다.
 
⑦《순천보(順天譜)
 
원래의 책명은나주압해정씨족보(羅州押海丁氏族譜)로 되어 있으나 두호공(斗湖公, 時潤)께서 마침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로 있을 때 편간한 것이기 때문에 통상순천보(順天譜)라 부른다.
전부공(典簿公, 時述)이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또 각파의 보계(譜系)를 취해서 서로 참고하고 고증하여 한 권의 보첩(譜牒)을 이룩하였으나 간행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공의 조카(昌燾)가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임지에서 비로소 30권으로 간행하였지만(해영보), 불행히도 화재로 그 판각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 후 새롭게 우담공(愚潭公, 時翰)이 발의하여 공론을 모으고, 마침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가 된 두호공(斗湖公, 時潤)이 자금을 마련하고, 생원 균도(均燾)로 하여금 실무를 감독하게 하여 조선조 숙종 28(1702)에 간행하니 이것이 곧순천보이다.순천보의 바탕은해영보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되 미비한 부분을 충분히 보충하고, 찬인(撰人) 직계위주의 형태에서 벗어나 종족(宗族) 전체를 아우르는 근대적 족보의 형식을 우리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보록과는 달리 외계(外系)는 간략하게 하고 본손(本孫)은 훨씬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런데해영보에 부록되어 있던 <선세비갈문(先世碑碣文)>을 모두 산제(刪除)해 버린 것은 아마도순천보를 간행한 분은해영보를 간행할 때와 비교해서 자손이 많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필사라든가 판각에 들어가는 비용부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나아가 어느 특정 계보 위주의 형식을 벗어나서 전체를 아우르는 족보의 형태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여 진다.순천보의 서문과 발문을 아래에 번역 소개한다.
 
순천보 서(順天譜序)
종족에 보()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우리 선세(先世)의 보록(譜錄)은 병란(兵亂) 중에 흩어져 없어지고, 그 후 연거푸 상란(喪亂)을 당하여 미처 보완해서 편집할 틈이 없었다. 족형 시술(時述) 씨는 선조들을 아주 돈독(敦篤)하게 숭모(崇慕)한 나머지 여러 해 동안 수집하고 또 각 파의 보계(譜系)를 취해서 서로 참고하고 고증하여 일부를 집성(輯成)하였다. 이에 따라 그 조카 창도(昌燾)가 황해도 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약간 권을 간행(刊行)하였지만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곳이 있었음으로 다시 수정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안팎으로 미세한 곳까지 다 바로잡혀졌다. 공의 공로로 편집은 완성되었으나 공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애석하도다! 우리 형님은 일생의 정력을 이 보록(譜錄)에 다 쏟으셨는데 그 간행도 하지 못하셨다. 내 일찍이 우리 형님께서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힘껏 노력하는 부지런함에 감동하고, 또 그 보록이 없어져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전 번에 내 마침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어 이 보록을 간행하는 일을 열심히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재물(財物)을 모으고 봉록(俸祿)을 출연(出捐)하여 장인(匠人)들과 간행을 계획하고, 족질(族姪) 생원 균도(均燾)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태어나서 미처 등록하지 못했던 자는 추가로 수록(收錄)하고, 본손(本孫)은 상세하게 하고, 외손(外孫)은 간략하게 한 것은 보록의 상례(常例)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는 대개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못한 데서 연유(緣由)하였으니 열람하는 사람들은 양해하시기 바란다.
숭정(崇禎) 기원 후 임오년 4월 하순
불초 손 통훈대부행순천도호부사(通訓大夫行順天都護府使)
시윤(時潤) 근서(謹序)
<순천보발(順天譜跋)>
무릇 파()가 있다는 것은 물이 근원지에서 갈래로 나누어지고, 나무의 가지는 밑줄기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사람들의 시조(始祖)와의 관계도 물의 갈래나 나무의 가지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까지 나누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나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게 열심히 보()를 지으려 하고, 거기에 자기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송대(宋代)의 정호(程顥)의 말에자손으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 보계(譜系)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라고 했고, 역시 송의 노천(老泉) 소순(蘇洵)은 자기네 보록(譜錄)의 서문에서소씨의 족보는 소씨의 종족들을 보()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족보로 기록해 놓는 뜻은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망족(望族)들에게는 다 세첩(世牒)이 있었다. 우리 선조의 보록(譜錄)은 병란(兵亂) 중에 잃어버린 후, 다시 만들려고 했으면서도 만들지 못한 것이 이에 벌써 몇 세()가 흘러갔다. 족부(族父) 가평공(加平公 時傑)술선록(述先錄)을 지으셨고, 족부 전부공(典簿公 時述)은 내 외파(內外派)를 취하여 한 권의 보()를 집성(集成)하고 조카 감사(監司) 창도(昌燾)로 하여금 해영(海營)에서 계간(繼刊)하게 하였지만 불행히도 판각이 강서(江西)에 있는 절에서 불타버렸다. 그래서 지난 임술 년에 다시 수록하고 상호 참고해서 고정(考訂)하여, 안팎으로 빠짐없이 미세한 곳까지 다 바로잡혔었다. 그러나 물력(物力)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아 결국은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몇몇 종족(宗族)들은 제각기 이름을 지어 남과 다를 바 없게 되어버렸으니 이는 우리 가문(家門)이 다 함께 한탄할 일이다.
얼마 전에 족부 법천공(法泉公 時翰, 愚潭先生)이 널리 수합하여 종족을 중히 여기는 뜻을 밝힐 것을 제안하셨고, 족부 두호공은 순천부사로 나아간 후 드디어 족보 간행을 계속해서 완성하려는 뜻을 가지셨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족보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여러 가지를 꼼꼼히 살피고 한 달을 검열(檢閱)하고 나서야 마침내 일을 끝마치니, 두호공의 족보를 편수한 공로가 어찌 다만 전인들의 것보다 나아진 그것뿐이겠는가?
! 우리 가평공이 아니었으면 세덕(世德)이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으며, 우리 전부공이 아니었으면 파계(派系)가 어떻게 상세히 파악될 수 있었겠는가? 법천공이 있음으로써 그에 의지하여 종족들이 널리 규합되었으며, 두호공이 있음으로써 그에 의지하여 세보(世譜)가 간행될 수 있었으니 우리 집안에 이 네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곧 우리 가문의 큰 영행(榮幸)이라고 하겠다.
외손들을 간략하게 하여 이로써 내 외손을 구분하였고, 친족을 상세하게 하여 이로써 근본을 중히 여기는 도리를 밝혔다. ()도 같고 자()도 같은 경우에 연()에 따라 빼어버린 것은 아이와 어른을 구별하여 혼잡함을 분명하게 한 것이요, 누구를 아내로 맞고 누구의 아내가 되었다는 등으로 각각 구별한 것은 본종(本宗)을 존경하고 오계(吾系)를 높인 것이다. 끝에다가 십대계(十代系)를 붙인 것은 그 뿌리를 밝힌 것이요, 이에 한 폭의 도표를 비워 둔 것은 어떤 뜻이 거기에 있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 사람이 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선조(先祖)를 알 수 있으며, 종족(宗族)이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종파(宗派)를 알 수 있겠는가? 대대로 내려온 계보(系譜)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것에 주목하면 마치 물에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이 곧 그와 나의 종파가 한 사람의 몸에서 갈려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고, 또 마치 나무의 밑줄기에서 가지가 생겨나듯이 한 사람의 몸이 그와 나의 구별로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효제지심(孝悌之心)은 여기로부터 솟아난다.
훗날 자손들 중에 이어서 보()를 짓는 자가 있으면, 장차 이 족보에 대하여 느낌이 있으리라.
숭정(崇禎) 기원 후 임오년 여름 4월 하순
불초(不肖) 손 생원 균도(均燾) 근발(謹跋)
 
경오보(庚午譜)
 
경오보는 우리 문중에 남아 있는 네 번째로 오래된 족보이다. 고종 7(1870)에 출간되었으니 조선조 숙종 28(1702)순천보가 나온 이래 꼭 168년 만에 나온 것이다. 보학 상으로 볼 때, 168년이란 세월은 거의 여섯 세대가 흘러가는 시간이다. 근자의 추세로 대략 1세대(30)의 시간차로 족보를 간행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너무도 긴 세월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사이 이런 저런 사유로 세거지나 우리 나주정씨의 집성촌을 떠나 살았던 수많은 일가친척들이 상대(上代)의 계보를 잃어버리고 있다가 훗날 다시금 입적을 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과거의 족보들은 시종 계파위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권두의 서문이나 권미의 발문을 제외하고는 기타 너저분한 문자는 거의 실어 놓지 않았었다.경오보역시 권두에 두 분의 서문이 붙어 있고, 권말에는 한 분의 발문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서문-1은 자칭 평민이라고 한 순교(洵敎) 근서이고, 서문-2는 대익(大翊) 근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발문은 조봉대부 종친부직장을 지내신 대식(大栻) 근발로 되어 있다.
이상 세 서문이나 발문을 쓰신 분들의 문장을 통해 살펴보면경오보는 그 당시 약호(若鎬) 형교(馨敎) 순교 세분 어른들을 비롯해서 대익 대식 우섭(友燮) 등 집안 어른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우리 정문의 최초의 활자본 족보이다. 뿐만 아니라 종전의 <월헌첩>은 우리 집안 최초의 보록이었지만 아주 간명한 매모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 뒤에 나온해영보는 목판본으로서 그 내용 또한 본가위주에다 외손 등도 비교적 소상하게 수록하였으며,순천보는 비교적 본손 위주로 바꾸어졌었다. 여기에 비해서경오보는 우리 족보 중 최초의 활자본으로 훨씬 현대화된 족보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 분량도 종원들의 증가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이상의 족보들이 모두 단권인데 비해서경오보는 획기적으로 불어나 무려 7권 또는 9권이란 방대한 족보로 발전하였었다.
1868(무진)년 봄, 우리 집안의 몇몇 어른들은 족보가 없음을 개탄하고 다시 족보를 편찬할 것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기왕에 <월헌첩> <수촌록>이 있었지만 전해오지 않고, 그 후해영보순천보가 나왔지만 이는 정밀하지 못한 초창(初創)에 불과한 목각으로 그것마저 그 당시에서는 이미 근 200년 전의 나온 것이어서 구해 보기가 쉽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태어나는 자손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친척지간의 관계는 나날이 소원해져 심지어는 남이나 다름없게 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마침내 형교 순교 두 어른이 발의하여 통문을 돌리고, 명첩(名牒)을 거두었으며, 제반 실무는 대식에게 맡겨서 추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때 이미 약호 어른이 만든 초보(草譜) 4책이 있었는데, 우섭을 시켜 그것을 근거로 다시 수정 보완해서 약 3년간의 시간을 드려 노력한 끝에 1870(경오)년에 이르러 마침내 여러 권의경오보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경오보는 혹시 두세 차례 이상 간행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어떤경오보에는 앞의 두 서문만 붙어 있고 발문은 붙어 있지 않는데, 지금 따로 발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문미에 발문이 붙어있는 판본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어떤경오보는 공계 7권인데 비해 또 다른 판본은 공계 9권인 것도 있다.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경오보는 아마도 여러 차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발간했었던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경오보는 활자본이기 때문에 처음에 찍어낸 수량이 수요에 충족하지 않으면 또 얼마든지 거듭해서 인행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주 편리하게 다시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세밀한 조사연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경오보가 세상 빛을 보게 되었고, 아울러 그 간 잠시나마 흩어졌던 나주정씨 자손들이 다시금 근본을 찾아 한 집안 한 족보 안으로 모이게 되었으며, 모든 자손들의 효제지심의 중추가 공고하게 확립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그 당시경오보에 실렸던 세 어른들의 서문과 발문을 새로 번역하여 그 원문과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문-1
보첩을 만드는 이유는 한 종족의 근본을 밝히기 위함이다. 만물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사람은 조상에 근본을 두고 있다. 조상으로부터 자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마치 나무에 가지와 뿌리가 있고, 산에 봉우리와 언덕이 있어 그것이 분포(分鋪)되어 내려오는 것과 같아, 비록 그 무리가 수천수만에 이르더라도 그 근본은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세가(世家)의 보첩을 만들어 그 하나 밖에 없는 근본을 밝히자는 것이다. 보첩을 만들어서 조상을 숭상하고, 종족을 존경하는 도리를 알게 하고, 근본을 알아 종족간의 화목을 닦는 의리를 돈독히 하는 것은 곧 그 목적이 세상의 가르침을 맑게 하여 교화시키는 데에 있는데 이를 어찌 하찮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 정씨는 고려조의 검교대장군공으로부터 구세에 걸쳐 관료들이 이어져 명성을 드높였고, 아조 초엽에는 은덕공께서 경사스럽고 어진 일을 많이 쌓아 자손이 번창하고, 대대로 이름난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아울러 문장과 훈벌로 마침내 조선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충정공에 이르러서는 덕량이 넓고 깊어 녹용(祿用) 또한 이에 부합하였으며, 내외 증손이 일천 이백여 명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시혜(施惠)로 그 결과가 이처럼 컸었다.
그 후, 가평공의 술선록, 해백공의 해영보, 참의공의 순천보에서 세덕을 분명히 열거하고 자손을 소상히 수록하여 첩본을 이룩한 지가 근 이백년이 되었다. 새로 태어나는 자손들은 날로 많아짐에 따라 친속은 날로 소원해졌다. 여러 대의 자손으로 내려가서는 각처에 흩어져 살게 되어, 기공 시단을 입는 촌수라 할지라도 혹 타향 먼 곳에 있으면 결국 일생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혹은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자는 계파의 전해오는 바를 알지 못함으로써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과 남과의 사이에 다른 점이 거의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오호라! 그래도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뜻을 이어 일을 추진하는 방도를 말하자면, 의론을 수렴해서 간행하고 그것을 널리 제종에게 반질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재력이 부족해서 시작만 하고 결과는 없어서 초지를 성취시키지 못했던 것이 또한 여러 해가 되었다.
무진 년에 족형 형교 씨가 통문을 돌려 제종에게 두루 취지를 알리고, 간행에 관한 모든 일은 족질 대식에게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계획을 세워 도모하고, 일마다 열심히 노력하였다. 명단에 따른 수금을 기다리지 않고 사재를 내어 우선 처리하니 불과 몇 년 만에 9책이 이루어졌다. 제족을 다 수록하고 원근을 다 모았으며, 각 계파를 두루 기록하였으니 상세한 부분까지 다 구비되었다. 이리하여 팔도의 제종들이 하나의 근본임을 알게 되었고, 완연하게 마치 한 집에 모여 앉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로부터 화목하는 의리가 평일보다 배에 이를 것이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더 후손들을 면려하게 될 것이니 이러한 것은 모두 보첩의 힘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또 선조에게는 영광되고, 우리 종족에게 공헌이 되는 일이니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쇄가 겨우 끝나자,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평민에 불과하여 선조님들에게 욕이 될까 두려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청탁이 제 3차에 이르자 이에 감히 목욕재계하고 여기에 본말을 대략 들어 놓는 바이다.
성상즉위 7년 경오 삼월 10
불초손 순교(洵敎) 재배하고 삼가 서문을 쓰다
 
서문-2
족보는 왜 만드는가? 사대부에게 족보가 없다면 그 선대 조상들을 잘 알 수가 없고, 후대에 빈번하게 태어나는 자손들도 또한 잘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 정씨에게는 옛날에도 족보가 있었고, 지금도 또 계속해서 족보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정씨는 일찍이 고려시대 검교대장군공 이후로 대대로 천년을 이어오면서 자손이 마치 하나의 수원에서 천개의 물줄기가 나누어지듯이 자손이 번성하였다.
나의 선조 관운공께서 처음으로 술선록을 1권을 찬술하셨고, 그 후 덕암공이 해 얼에서 또 간행, 단권의 족보를 이룩하여 널리 보급하시었다. 우리 정씨의 족보는 여기서 시작되었고, 참의공의 순천보도 또한 대략 같다.
오호라! 우리 월헌공 충정공, 그리고 고암 동원 우담 덕암 해좌 제공의 도학문장과 사관출처에 대해서는 모두 그 명예와 덕망이 일세에 빛났고, 그 명성이 후세에까지 전해져서 남들이 다 화종명문이라고 칭송하였다. 그 물려주신 은택의 전파하는 바와 남겨주신 음덕의 비호하는 바는 자손들이 오늘날 더욱더 번창하게 함으로써 가계와 가승이 여러 권으로 이어져 여러 질의 책을 이루게 되었다.
족질 진사 우섭 씨가 집찬의 일을 오래도록 미루어두었다가 빠지고 없어질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이에 나와 더불어 구보를 속편하여 새롭게 꾸미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3년 동안을 노력한 끝에 일을 끝내니 모두가 아홉 권에 달했다. 그러나 우리 종중의 돌아볼 겨를도 없는 일을 실로 우섭 씨의 지극한 정성과 독실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처럼 쉽게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제종들이 내가 덕암공의 후예로서 이번에 교감의 일에 참여했다고 하여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청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내 공손하게 일어나 재배하고 말하였다. “오호라!해영보순천보가 다 선조에 관한 것을 서술하는 일에서 나왔고, 오늘의 속보 또한 선조에 관한 것을 서술하는 일이다. 우리 종중에서 계술을 담당하는 것이 어찌 다만 보사뿐이겠는가? 소씨 서문에 이르기를:‘우리 족보를 관람하는 자는 효제지심이 절로 우러나온다.’고 하였으니, 우리 종족도 응당 효제지도로 계술한다면 곧 모든 우리 족보 안에 있는 자는 다 선조에 관한 것을 서술해 놓은 기록을 보고 감격하여 저절로 그런 마음이 우러날 것이다. 무릇 상례를 마치면 정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기복과 공복을 입는 자로부터 타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남이 되어 슬퍼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돈목지의를 어떻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진 조상의 후손이 된 자는 작은 선행으로는 유명해지기 어렵지만, 그러나 작은 악행으로도 욕먹기는 쉬우니 이 또한 두려워 할 일이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써 스스로 노력하고자 한다.”
그러자 제종들은좋습니다.”라고 말하매 결국 감탄하고 서문을 쓰게 되었다.
고종 7년 경오(1870)3월 기망
불초손 대익(大翊) 재배하고 삼가 서문을 쓰다
 
발문
정부자(程夫子)가 말하기를:“사람으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보계에 밝혀두어야 한다.”라 하였고, 소노천은 말하기를:“우리 족보를 관람하는 자는 효제지심이 절로 우러날 것이다. 보록을 만드는 의도는 역시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다 보첩을 소유하였는데 오직 우리 정씨는 오랫동안 보첩을 만들지 못하였었다. 옛날에월헌첩수촌록이 있었다고는 하나 일찍이 실전되었고,해영보순천보는 전쟁을 겪은 뒤에 자료를 모아 약간 권을 간행하였었지만 그것도 초창을 면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 후로 근 200년 동안에는 뜻은 있었지만 착수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또 시작만 했었지 마무리를 맺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보첩을 이룩한 사람이 없었으니 내 일찍이 이를 한탄하였다. 그러다가 무진년 봄에 족조 형교 씨와 순교 씨가 먼저 발의하고, 각 지방 제종들에게 통보해서, 명첩을 거두어 모으고, 나로 하여금 보첩 만드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내 스스로를 돌아볼 때 식견이 없어 그 일을 감히 맡을 수 없음이 당연하였지만, 족조 약호 씨가 이미 초보 4책을 집성하여 멀고 가까운 계파를 거기에 상세히 실어, 손금 보듯 분명하게 만들어서 집에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에 당질 우섭을 시켜 그 초보를 근거로 해서 경향 제종과 서로 대조 참고하고 수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비를 모으고 힘을 발휘하여 마침내 판각 인행의 일에 착수하여 3년 만에 끝마치니 모두 9책으로 이루어졌다.
오호라! 이 족보에서 선세에 관한 일을 서술한 것은 결국 종중의 소원을 수행한 것이며, 이리하여 우리 정문도 족보를 소유하게 되었다.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 실로 효제지심에 있다고 하는 말, 역시 여기에서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향후 백세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이 영구히 보전되고 돈목하기를 구구하게 바란다.
성상즉위 7년 경오 춘삼월 상순
후손 조봉대부 행종친부 직장
대식(大栻) 삼가 발문을 쓰다
 
⑨《신미보(辛未譜)
 
신미보경오보(1870)가 나온 지 61년이 지난 1931년에 성균박사 원섭(元燮) 씨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자손들은 많이 불어나고 있으나 세상은 어지럽고 전염병 등 천재지변이 계속됨에 혹 일가들이 뿔뿔이 흩어져 남이 되어버릴까 두려워한 나머지, 무진(1928)년부터 제종들과 상의하고, 정성과 노력을 다 경주하여 마침내 만 3년 뒤인 신미(1931)년에 완성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시의적절한 보종친족(保宗親族)을 위한 크나 큰 업적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신미보는 모두 2211책으로 이루어졌고 우리 족보로는 첫 번째의 납 활자 인쇄본이다. 표지 책명은나주정씨족보(羅州丁氏族譜)지만 신미년에 나왔기 때문에 통상신미보라 부른다. 서문은 성균박사 대하(大夏) 씨가 썼고, 그 다음으로술선록(時傑)순천보(時潤)경오보(洵敎大翊)의 서문도 차례대로 전재(轉載) 소개해 놓았으며, 말미에는 생원 균도(均燾)순천보발문과 직장공(直長公) 대식(大栻)경오보발문이 전재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쪽에는 항렬도(行列圖)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들은 다 목록 이외의 문장들이다.
그리고 <범례><목록>이 있는데 이 두 항목의 내용을 보면신미보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특히 주안점을 어디에 두고 편찬되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우선 <범례> 중에서 관례적이고 상투적인 항목은 제외하고 주요한 항목을 골라서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우리 정씨의 본적은 압해였다. 압해현에 정승공의 묘가 있는데 정씨 제족은 대개 여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본적을 삼았다. 그런데 후에 압해가 나주에 예속 됨에 따라 나주로 이적하게 되었다.
1. <압해지>와 관운공의 <속적변>, 두호공의 <성묘기>, 다산공의 <묘변> 등의 문 장을 앞에 실어서 우리의 원적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게 하였다.
1. 부규(譜規)는 하나같이경오보의 관례에 따랐고, 족보에 빠진 자라 할지라 도 명확한 증거가 있는 자가 아니면 쉽게 입록(入錄)하여 윤리를 망치게 하지 않도록 하였다.
1. 자녀는 아들을 먼저, 딸을 나중에 기록하여 본종(本宗)을 중시한다는 뜻을 세 웠다.
1. 서출(庶出)의 자녀에 대해서는 서() 자를 다 지워버리고 적자의 지위로 편 입시켰다.
다음은 <목록>을 보자.
1
나주압해지(羅州押海誌) 속족변(屬籍辨) 압해묘변(押海墓辨)
성묘기(省墓記) 정승묘변(政丞墓辨) 진주육총변(晉州六塚辨)
사보변(私譜辨) 묘도(墓圖) 구묘문(丘墓文)
교서(敎書) 사제문(賜祭文) 상계(上系)
상계부터가 족보의 본문으로, 상계에는 제1대 시조 정윤종으로부터 제15대에 이 르기까지가 수록되어 있다.
2 교리공 제1자 현감공파 권 3 교리공 제2자 진사공파
4 교리공 제3자 충순위공파 권 5 문화공 증손 병사공파
6 문화공 제2자 대사성공파 권 7 전첨공 제1자 별제공파
8 전첨공 제2자 통덕랑공파 권 9 전첨공 제3자 통덕랑공파
10 전첨공 제4자 승의랑공파 권11 고암공 제1자 계공랑공파
12 고암공 제2자 승지공파 권13 고암공 제3자 참판공파
14 초암공 제2자 감찰공파 권15 초암공 제3자 통덕랑공파
16 도헌공 제1자 참공공파 권17 도헌공 제2자 정랑공파
18 도헌공 제3자 사성공파 권19 도헌공 제4자 동원공파
20 도헌공 제5자 진사공파 권21 첨정공파(僉正公派)
22 부사공파(府使公派)
<범례>에서 족보에 누락했다고 해서 명확한 근거 없이 입적시키는 것은 윤리를 망가뜨리는 것이라고 한 점과, <목록> 중 선조님들의 압해 본적지와 진주 석갑산 육총에 대한 논변을 특히 앞부분에 실어서 강조한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이 특별히 주목하고 그 뜻을 잘 읽어서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신미보의 서문 전체를 소개한다.
 
()라고 하는 것은 세계(世系)를 기록한 문서이다. 주관(周官) 소사(小史)는 나라의 기록하는 업무를 관장, 계세(系世)를 존중하고 소목(昭穆)을 분명히 하였다. ()<세가연표(世家年表)>나 당()<씨족지(氏族志)>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도 씨족문벌을 중히 여겨, 무릇 대가 세족(大家世族)의 성씨는 각각 족보를 가지고 있다. 이로써 파계를 엄히 하고, 소목의 서열을 정하여, 한 종족 안에서는 소원한 관계를 합쳐서, 조종(祖宗)을 존경하고 친륜(親倫)을 두터이 하여, 종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반드시 하나에 근본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족보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우리 정씨는 검교대장군으로부터 고려조에서 9대에 걸쳐 벼슬이 이어져 빛났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은덕공(隱德公)이 덕과 선을 쌓아, 자손이 번성하고 이름난 공경(公卿)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다. 월헌공의 문장과 청절(淸節)이 일세에 빛났고, 충정공의 높고 큰 덕망이 국조에서 높이 평가됨으로써 부연히 역중의 망족이 되었다. 우리의 족보는술선록》《해영보》《순천보에서 비롯되었으나, 혹은 중간에 비절(圮絶)되어 흐려지고, 혹은 찢어지고 흩어져서, 존몰(存沒)조차 명확하지 않아, 별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없어지게 하고 소략하게 한 아픔을 면할 수가 없었다.
고종 경오(1870)년에 이르러 비로소 큰 족보가 이루어져, 일족의 무리를 합치고 친친의 의미를 더욱 넓힌 지도 금년으로 벌써 60년이 지났다. 소목이 차례를 따라 바뀌고, 태어나는 후손들은 점차 많아지는데 세태는 어지럽고 난리는 계속되어 실로 족보를 이루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만들어 놓지 않으면 장차 반드시 겸관(兼管)해줄 곳이 없어져 일가들은 곧 남처럼 되고 말 것이다.
족질 원섭(元燮) 군이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이에 무진년으로부터 제종을 모아 족보 중간에 대한 일을 도모하였다. 심력을 다 기우려 시종 간단없이 노력하여 4년이 흘러간 신미년에 공역이 성취되었으니, 대개 그의 돈종수족(敦宗收族)의 성의와 조상의 뜻을 계승하고 종사를 서술하는 도리가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경에 이르기를:“효자의 효성이 지극하니 영원토록 복을 내리시겠네.”라 하였는데 선조를 추모하여 현양하는 것이 효(), 일가를 모아서 하나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인()이다. 무릇 이 족보에 함께 오른 사람들이 효도하고 착한 이상, 아비는 가르치고 형은 격려해서 더욱 노력하고 돈독히 한다면, 불원간 선조의 음덕을 입고 여음(餘蔭)을 받아 우리 가문이 계속 창대해짐으로써 하늘이 복을 내리시는 경사가 많아진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편집이 완료된 후, 책머리에 붙일 글을 나에게 요청하매, 내 늙은 핑계로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이에 감히 붓대를 잡고 간행에 관한 일을 쓴 것이 대체로 위와 같다. 그 본적의 출신과 각 파의 분파, 그리고 역대의 아름다운 행적의 자세한 부분은 다 보첩에 실려 있음으로 지금은 다시 여러 말 하지 않는다.
 
신미(1931)920
성균박사 불초손 대하(大夏) 재배하고 삼가 서문을 쓰다
⑩《신축보(辛丑譜)
 
1931년에신미보가 나온 지 꼭 30년 만에 계속해서나주정씨족보(羅州丁氏族譜)가 나왔다. 그 해가 바로 신축(1961)년이었기 때문에 이 족보를 일명신축보라고 부른다.
체제는신미보와 대동소이하다. 모두에는술선록》《순천보》《경오보》《신미보의 서문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범례(凡例)>와 항렬도(行列圖)가 있다. 이어서 <목록>이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일(卷一)
나주압해지(羅州押海誌) 속적변(屬籍辨)
압해묘변(押海墓辨) 성묘기(省墓記)
정승묘변(政丞墓辨) 진주육총변(晉州六塚辨)
사보변(私譜辨) 묘도(墓圖)
구묘문(丘墓文) 교서(敎書)
사제문(賜祭文) 갑술전시(甲戌殿試) 권친필(卷親筆)
상계도급상계(上系圖及上系)
권이(卷二)
교리공파(校理公派)
문화공 증손 병사공파(文化公曾孫兵使公派)
문화공 제이자 대사성공파(文化公第二子大司成公派)
권삼(卷三)
충정공 제일자 전첨공파(忠靖公第一子典籤公派)
권사(卷四)
충정공 제이자 고암공파(忠靖公第二子顧菴公派)
권오(卷五)
충정공 제삼자 초암공파(忠靖公第三子草菴公派)
권육(卷六)
충정공 제사자 도헌공파(忠靖公第四子都憲公派, 第一子 第二子 第三子)
권칠(卷七)
충정공 제사자 도헌공파(忠靖公第四子都憲公派, 第四子 第六子)
첨정공파(僉正公派)
()
신축보<범례>를 살펴보면, 대체로 통례(通例)와 같고 다만 네 번째 조항에서 다소 특히 강조한 면을 감지할 수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규(譜規)는 하나같이 전보(前譜)에 따르되, 만약에 족보에 누락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가볍게 입록(入錄)시켜서는 안 된다. 윤리를 어기고 종론을 위배하고서 참여하지 않는 자는 전보의 규례(規例)에 따라 삭제하기로 한다.”
이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금후라도 족보를 수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충고가 되는 말로서 후손들이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하겠다.
그리고신축보는 아주 보기 좋은 활판 인쇄로 엮어져서 열람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모두 7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태여 결점을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역시 교정을 소홀히 하여 오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신축보는 서문은 보이지 않고, 책 말의 발문은 이상하게도순천보의 균도(均燾),경오보의 대식(大栻) 두 분의 발문을 전재(轉載)해 놓았는데 이는 아마도 후세에 우리 족보발행의 연혁을 알리기 위한 참고 자료로 제공할 의도인 듯하다. 그 당시의 발문으로는 후손 대의(大懿)와 고암공의 12대손 규완(奎完) 두 분의 발()이 붙어 있다. 그런데 고암공 12대손인 규완 씨의 발문 속에도 역시시조 고려검교대장군 휘 윤종 이하 구세가 관리로서 면면이 이어졌다.(始祖高麗檢校大將軍諱允宗以下九世簪纓連綿不絶.)”운운이라고 우리 나주정씨의 시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면 당시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아래에 두 분의 발문을 번역 소개하기로 한다.
 
()1
일가들이 족보를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일가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태극이 있어서 형상이 드러나고, 땅에는 만물이 있어서 정교하게 모이며, 사람은 씨족이 있어서 붙이들이 합치는 것이니,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삼재의 하나로 기꺼이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소자가 말하기를:“나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유연히 우러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족보를 기록하는 뜻은 선조를 존경하고 일가들끼리 정을 두텁게 하고 화목하게 지내려는 데에 있다. 그러니 만약에 족보가 없다면 어떻게 조상의 맑은 덕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일가끼리 친목을 도모할 줄 알겠는가?
!월헌첩수촌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보전하지 못하였고,해영보순천보의 약간 권은 비록 보전되기는 하였으나, 세월이 이미 많이 흘러 남아서 전하는 것이 아주 드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후 거의 200년이 지나, 고종 경오 년에 아홉 권의 족보를 편찬하였지만 당시 교통통신이 불편하였던 까닭에 족보에 누락된 자가 많았으며, 또 그 후 62년 만에신미보11권이 이루어졌으나 그때도 제족이 각기 흩어져 살다보니 그들의 계대를 잃어버려, 역시 족보에 누락된 자가 많았으니 그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족보를 편찬하는 일은 선대를 계승하고 후대로 이어가는 도리로서 당연지사라 하겠으나 지금의 정세로 봐서 국토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사람들은 살림이 어려워서 일을 뜻대로 이룰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경자 년 105일의 충정공 향사 때에 경향의 여러 일가들이 제사에 참석하고자 많이 모였음으로 비로소 묘정에서 족보를 편찬할 것을 발의하게 되었었다. 여러 일가들이 반기는 마음으로 뜻을 모았기 때문에 족보를 편찬할 계획을 세웠었고, 시작한지 1년 만에 일을 마쳤으니 이 어찌 감개할 일이 아니리요? 오직 우리 일가들로서는 영구히 잊어지지 않을 성사로 느꼈을 것이므로 아마도 이 족보는 후세에 영구히 전해질 것이다. 이에 감히 졸렬한 발문을 끝에 붙이니 각파의 여러분들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란다. 백세를 이어갈 후손들은 영원히 잊지 말고 효도하고 공경하는 근본과 돈독히 화목할 도리를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신축 년 중추 상한에
후손 대의(大懿) 삼가 발을 쓰다
 
()2
시경에는하늘은 백성을 낳고, 사물마다 법칙이 있게 하였도다.”라고 하였고, 사람은 강상지도로 소목의 순서를 밝히고 예의의 분수를 바르게 하는데, 이것은 다 주나라 소사의 본분이었다. 아시아는 본래 인류의 발상지로 특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예의지국이라 불러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다 부러워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러러보려는 지역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족보를 편찬하여 붙이를 수용하는 일을 어떻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는 보(), 즉 넓고 중대하다는 뜻이다. ()라고 한 것은 종통을 밝게 세우고, 파별을 나란히 기록하고, 선조의 유적을 상세하게 추적하여, 이어서 태어나는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니 이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는가?
정씨는 근고(近古)로부터 족보를 가졌었으나 왜호 두 난리로 말미암아 거의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아주 드물다. ! 관운공께서 처음으로술선록을 초찬(抄撰)하였고, 이어서 덕암공이해영보를 수찬하였으며, 두호공이 순천보를 지으셨고, 또 이어서 고종 경오년에경오보, 신미년에신미보가 나옴에 이르러서 우리 정씨들의 대보가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시조 고려검교대장군 휘윤종 이하 9세가 관리로서 면면이 이어졌고, 이씨조선에 이르러서는 은덕공이 누인적덕(累仁積德)하신 후덕으로 자손들이 명공거경(名公巨卿)으로 갖추어 배출되었고, 도덕과 문장으로 그 명성이 세상에 들어나 지금까지도 명문화족이라 칭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음덕이 후세에 미쳐서 자손들이 번창하여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이를 어찌 창대(昌大)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오호라! 신미년에 족보를 만든 이래 어언 30여 년이 지났고, 그 위에 경인년 동란으로 국토는 분열되고 민족은 서로 흩어져 그 향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에 근자 족대부 대의 씨가 이를 통탄하고 분연히 일가를 한데 모을 의견을 발동하였다. 그래서 지난 경자 년 무원향사(茂院享祀)를 치루고 나서 여러 종인들이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천안의 불당동에서 종회를 열어 마침내 족보를 중간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때 종회의 의견들은 다 대의 씨는 신미년 족보를 수찬할 때 이미 유사를 맡았던 경험이 있었던 고로 도유사로 추천되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찬성하였고, 헌섭 씨와 규완은 참여하여 교정의 일을 보게 하였다.
부족한 나 규완은 본래 재주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고사하였으나 제종들이 강제로 권하매 결국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야말로 이른바 피를 벼 싹으로 잘못 본 짝이요, 모래를 움켜쥐고 진주를 버리는 한심스런 격이라고 하겠는데, 송나라 소순(蘇洵)의 가보(家譜)나 한나라 사마천(司馬遷)의 필치에는 더 논할 것도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으로 옷만 적시다가, 부족한 나는 수임 이래, 밤낮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선조들의 행적은 전에 나온 족보를 참고하거나 집안 어르신네들에게 물어서 매장 확인해서 초하였다. 그리고 보판(譜板)8층으로 난을 만들고, 세대에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서 기록하는데, 공백이 생기면 상란에 방주를 하고 똑바로 그 밑에 기록하였다. 이 역시 전례는 아니지만 기실 세대의 서열을 밝혀 놓는다는 이치와는 무관하고, 11권으로 되어 있던 이전의 족보를 7권으로 축소시켰는데 이는 오늘날 약간의 절약이 우리의 경제사정과 부합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송구스러운 바는신미보에 실렸던 여러 구 갈문에는 간혹 잘못하여 탈루된 곳이 있었음으로 원각을 참고하여 바로잡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신보(新譜)에는 어찌 전보(前譜)에서 탈루한 것 같은 착오가 없겠는가? 분파도를 모사하여 권두에 삽입한 것은 사람들이 책을 펼칠 때마다 소목의 서()와 항렬의 변()이 요연하게 소씨가 말한 바대로효제지심이 어찌 유연히 생기지 않으랴!”하는 생각이 눈에 들어오게 함이었다.
제종이 합심 협력하여 그 공이 1년도 안 되어 이루어졌고, 이에 계대를 밝혀 선조에 대해 서술하는 일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삼가 서투른 말로 족보를 수찬하게 된 전말을 말미에 붙인다.
광복 후 17(신축)년 추석,
고암공 12대손 불초 규완(奎完) 근발
 
⑪《기묘보(己卯譜)
 
기묘보1999년 즉 기묘년에 간행된 것으로, 연도가 이제 겨우 12년 밖에 되지 않았고, 또한 대부분의 우리 종원들 집에 보관하고 있으리라고 여겨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역대 나주정씨 족보의 전승도표(傳承圖表)
月軒帖失傳
󰀳……………………(1520)月軒公(壽崗) 記錄……………………↴
僉正帖 失傳
(1550년경) 僉正公 기록
譜記 失傳
(1600) 草菴公(胤祐) 記錄
水村錄失傳譜錄 失傳
仁祖6(1628) 水村公(彦璿) 기록 1625) 監察公(彦珪) 기록
⇣ ⇣
原派錄 失傳
(1660이전) 典簿公(時述) 기록
⇣ ↓ ⇣
…………………………述先錄…………………………………↲
顯宗1庚子(1660) 觀雲公(時傑) 편찬
海營譜
肅宗3丁巳(1677) 海伯公(昌燾) 간행
順天譜
肅宗28壬午(1702) 간행, 時潤 序, 均燾 跋
庚午譜
高宗7 庚午(1870) 간행, 洵敎 大翊 序, 大栻 跋
辛未譜
辛未(1931) 간행, 大夏 序
辛丑譜
辛丑(1961) 간행, 大懿 奎完 跋
己卯譜
己卯(1999) 간행, 海昌 序, 義鎭 跋
 
 
 
7. 나주정씨의 항렬표(行列表) 및 해설
 
1234567
윤종(允宗)혁재(奕材)()()()공일(公逸)원보(元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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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011
()안서(安瑞)광서(光瑞)안경(安景)()자급(子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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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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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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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20212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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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2627282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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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333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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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7383940
(⋅○)(○⋅)(⋅○)(○⋅)(⋅○)⎯⎯⎯

해설:
항렬이란 같은 혈족 간의 상하 대수(代數) 관계를 표시하는 계열(系列)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구분하는 글자를항렬자(行列字)’라고 한다. 그러니까 항렬이 하나만 높은 분이라도 이는 아버지와 동항동렬(同行同列)이라는 점에서 공경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항렬자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는 항렬자가 없었다. 삼국시대에는 성()도 아직 없었는데 어떻게 항렬자가 있었겠는가? 고려시대부터 성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후로 시대를 따라 내려오면서, 형제를 둘 이상 여러 명을 둔 경우에, 이름이 외자일 때는 한자(漢字)의 부수(部首)를 같게 해서 이름을 짓는 관습이 있었고, 이름이 두 글자일 때는 그 중 한 글자는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관습이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런데 이런 관행은 아마도 고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듯하다. 당송팔대가로 유명한 송대의 소식(蘇軾) 소철(蘇轍)의 형제가 그러하였고, 명대의삼원(三袁)’으로 이름난 문호 원종도(袁宗道) 원굉도(袁宏道) 원중도(袁中道) 삼형제가 또한 그러하였음을 보면 곧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항렬은 대체로 일(一二三四五)의 수자(數字), (甲乙丙丁戊)의 오갑(五甲), 또는 화(火土金水木)의 오행(五行), 또는 인(仁義禮智信)의 덕목(德目) 등의 순서에 따라 항렬자를 정한다. 우리 나주정씨의 경우는 오행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화생토(火生土)”이니 섭() 자 아래는 규() 자이고,“토생금(土生金)”이니 규 자 아래에는 진() 자이고,“금생수(金生水)”이니 진 자 아래에는 해() 자 또는 순() 자이고,“수생목(水生木)”이니 해와 순 자 아래에는 영() 자 또는 식() 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계속 되풀이 해 나간다. 그리고 매 항렬자는 다 화토금수목 다섯 글자의 변방(邊旁)이 들어 있거나 그 변방 글자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글자로 되어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섭() () () () () 등의 글자에는 다 불화 자, 흙토 자, 쇄금 자, 물수 자, 나무 목자가 들어 있어서 오행의 뜻이나 성질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나주정씨는 시조로부터 약 10세에 이르는 즉 고려시대 말에 이르기까지는 아마도 이름에 항렬자를 거의 쓰지 않았던 것 같고, 비록 썼다고 하더라도 형제가 거의 없었으니 항렬자를 사용할 여건이 못 되었을 것이다. 그 중에 오직 8세 한 세대에만 삼형제가 있어서 서() 자를 항렬자로 사용한듯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러다가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항렬자로 이름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0세서부터 15세에 이르는 동안은 월헌공파를 제외하고는 각 파에서 쓰는 항렬자가 서로 달라 통일되지 못하였다. 아마도 서로 내왕하기가 쉽지 않아 소통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경부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렬자 사용이 거의 장착되었다고 보여 진다.
지은이 : 정범진 문학박사 전 성균관대총장
등 록 일 2011-07-18 오후 9: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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